서리꽃 / 조정래
2026-10-08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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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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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애절해서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랑 이야기

조정래’는 곧 ‘문학계의 거장’을 뜻하는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온 생애를 문학에 바쳤고, 한국문학을 넘어 세계문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치열한 작품 활동을 펼쳐온 작가다. 지금까지 68편의 소설을 써냈으며, 특히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3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서리꽃』을 펼쳤다. 책의 서두에 17쪽에 걸쳐 이어지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평생 작가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직업병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쓰는 삶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삶 자체를 즐겼다고 말한다. 그 대목이 유난히 숭고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서리꽃』은 끝없이 베푸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다. 『태백산맥』, 『정글만리』, 『황금종이』 등을 통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뜨거운 삶을 그려온 조정래 작가가 젊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부터 의외였다. 여기에 반 고흐의 삶과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도 색다르게 다가왔다.
웹서칭을 하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알게 되었다. 역사와 시대를 다룬 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가 왜 갑자기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까. 한 강연장에서 한 독자가 “왜 사랑과 연애에 관한 소설은 쓰지 않느냐”고 물었고, 마침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감각이 그 질문과 맞물리면서 두 권짜리 장편 사랑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서리꽃』은 그의 첫 사랑소설인 동시에 마지막 장편소설이 되었다.
1권이 이재이와 윤소인이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깊이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다면, 2권은 ‘암’이라는 병으로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이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특히 반 고흐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의 삶과 작품,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사랑의 슬픔과 반 고흐의 작품이 겹쳐지면서 소설은 조금 특별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두 주인공의 첫 만남부터 ‘반 고흐’를 예술적 모티브로 등장시키고, 소설의 마지막까지 중요한 연결고리로 활용한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반 고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직접 찾아 취재했다고 하니,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시에 시화를 그려준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 뒤 5년 동안 마음에 품고, 매일 자신의 사랑을 수첩에 기록한 이재이. 5년 만에 다시 만난 윤소인에게 그 수첩을 건네며 마침내 연인이 된 두 사람의 사랑은 한 편의 시 같고,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래서인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지켜내려는 이재이의 모습은 현실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랑의 모습이기에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보장된 상속금 200억, 400억을 과감히 포기하는 사랑. ‘과연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책을 읽는 내내 던지게 된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어쩌면 영원한 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했다.
가난... 그것은 1차로 생명을 위협하고, 2차로 생애를 구속한다. 그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아무런 응답도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다. 철학의 무능이고 한계다. 그 해결책은 오로지 하나, 돈이다.
— 1권, 152쪽
이 문장에서는 조정래 작가 특유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현실의 삶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사랑 역시 돈과 질병, 가족과 사회라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조정래 작가는 83세의 나이에 왜 이런 사랑 이야기를 썼을까. 그가 평생 발표한 작품 가운데 이토록 애절한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소설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재발견이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 상대가 가장 힘겨운 순간에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마음. 결국 사랑의 본질은 거창한 말이나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끝까지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쯤 꿈꾸었던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판타지처럼 느껴지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답고, 현실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기에 더욱 오래 꿈꾸게 만드는 사랑이다.
두 마리의 학은 정상의 하늘에서 만났다. 두 마리 학은 서로 날개 부딪치고, 긴 목 서로 감으며 한참이나 휘돌며 솟구치고, 감돌며 내려앉고 하다가 각각 떨어졌다. 그리고 큰 날갯짓을 하며 나란히 날기 시작했다.
— 2권, 278쪽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잠시 서로를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다시 각자의 길로 떠나는 두 마리의 학. 하지만 함께 날았던 순간만큼은 분명 서로의 삶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서리는 기온이 떨어져야 맺히고, 따뜻한 밤에는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추운 밤에 피었다가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서리꽃처럼, 이재이와 윤소인의 사랑 역시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래서 『서리꽃』을 읽고 나면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 진짜 사랑일까. 함께한 시간이 길어야 깊은 사랑일까. 아니면 짧은 순간이라도 서로의 삶을 온전히 바꿔놓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어쩌면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뒤에도 우리 안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저에게 행복을 만들어주는 태양... 반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 2권, 253쪽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고, 지나온 사랑을 소환해 지금의 사랑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서리꽃』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56년간 쉼 없이 집필해온 문학의 거장이 마지막 장편소설에서 선택한 것은 거대한 역사도, 우리 사회의 뜨거운 현실도 아닌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83세의 조정래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건네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사랑.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사랑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 추운 밤에만 피어나는 서리꽃처럼 짧고 애절했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오래 기억되는 사랑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