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감촉 / 은희경
2026-09-14조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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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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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 은희경

아주 오랜만에 은희경 작가의 신작을 만났다. 반가움과 동시에 기대감이 상승했다. 그리고 역시! 라는 말로 책을 덮었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조합, 삶을 들여다보는 태도 등이 '역시 은희경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람은 역시 쉬어야 고개를 들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고개를 드니 발등에 떨어져 있는 불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의 주변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좌표가 읽히는 것이다. (157쪽)
오래전 안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여행은 장소뿐 아니라 시간의 이동인 것 같다고.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 언젠가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과 마주치면 그 순간 시간의 회로가 교란된다고.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때로 전생까지 거슬러 상상해보게 되는 그 데자뷰의 전율이 현생에서 도망친 데서 오는 해방감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자신의 지난 생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 한 발 들어선 설렘이었다고 말이다. (203쪽)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212쪽)
안나가 어머니의 죽음에서 배운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한다.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 마는 것이다. (214쪽)
안나는 업무가 과중하다거나 인사가 부당하다거나 하기 싫은 잡무, 낡고 비인간적인 시스템, 박봉 이런 건 직장의 기본 인프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따돌림과 모함과 질투 같은 것도 조잡한 인테리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부터 오는 고충은 어떤 면에서는 공인된 시련인 셈이다. (232쪽)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이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284쪽)
이십 년 넘게 의심을 떨치지 못했으면서도 믿으려고 노력했던 인간의 순수함과 품위에 대한 이데아가 무너진 것이었다. (286쪽)
늙어 보이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한들 그걸 의식했다는 것만으로도 늙음은 존재감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319쪽)
뭔가 인생의 새로운 능선을 오르기 전 호흡을 고르는 듯한 기분으로 지내다보니 전보다 몸이 좀 건강해진 느낌이라고 했다 한다. (366쪽)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373쪽)
우리 모두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