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립통합도서관

검색 열고 닫기

검색

검색

추천 도서 게시판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 슈테판 세퍼

2025-09-22조회 19

작성자
김은미
이메일
"인생에서 굴러떨어진" 남자의 일탈
슈테판 셰퍼 소설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을 읽고
 

 

 
 
아무런 정보도, 기대도 없이 펼쳤다가 빨려 들어가듯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내겐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이 그런 책이었다. 얇은 두께감과 느슨한 편집에 살짝 방심했었다. 나태주 시인이 '이 책은 소설이지만 궁극에는 시였다'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가 충분히 공감되었다. 시이면서 에세이이면서 소설이면서 인문학서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정신없이 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음을 깨닫고 후회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뿜어내고 있는 강력한 파동을 온몸으로 흡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종이에 인쇄된 따뜻한 포옹 같은 소설'이기에 너무 오래 일하고 아름다운 것을 곧잘 미루는 사람들, 성실함이 무기여서 잠시의 일탈도 허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소설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은 평범한 비즈니스맨이자 두 아이의 아빠가 혼자 시골 별장에 내려갔다가 괴짜 농부인 카를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살다 보면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에서 굴러떨어졌다"(14쪽)라는 감각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인생의 항로를 변경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는 누군가가 나의 길을 바로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혼의 나침반을 들고 방황하는 일을 멈추고 싶어진다.

'나'는 주말 아침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발가벗은 채 덤불에서 올라오는 남자, 카를을 만나게 된다. 카를은 감자를 키우며 취미로 수채화를 그리는 60대 노인이다. 또한 장난기 가득한 눈과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이 낯선 사람에게 대뜸 속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미리 계획되어 있던 일들을 포기하고 이틀의 시간을 그와 온전히 함께 보낸다.
 
그의 식탁에 초대된 '나'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카를의 통찰력에 빠져든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죽기 전에 무엇을 후회할까?' '왜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나?'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언젠가는 늘 지금이다'와 같은 대답을 찾아간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어떻게 하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매 순간 낭비 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좀 더 여유롭게 많은 경험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늘 뭔가에 쫓겨 불안하고 강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삶의 기준을 재정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은 바로 '오늘'이고, 가장 중요한 그 언젠가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끝내기를 선택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용기를 내야 한다.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몰랐는데 며칠 후에 깨달았어요. 지금 여기를 살고, 내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죠. 어차피 모든 일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일어나니까요. 계획할 수 없는 일에 그냥 응하기.(80쪽)
 
카를 역시 최악의 상황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 자신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는 일을 찾아내 더 의식적으로 즐기고, 소중하게 시간을 보내고, 더 세심하게 사랑함으로써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 앞에 펼쳐진 하루들이 총천연색이 될 수도 무채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누군가의 가장 깊은 곳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 그의 삶에 그늘이 어떻게 드리우는지 전혀 알 수 없다(158쪽)'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고, 자신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삶의 루틴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몇 번의 계절이 더 남았을지는 알 수 없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살 것이냐, 아니면 바람의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삶을 관조하듯 살 것이냐 생각하게 했다. 카를이 일주일에 단 하루를 '게으른 일요일'로 정해 놓았듯이 스스로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오늘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그 언젠가는 지금이다.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지난 이틀은 나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다. 용기는 언제나 도움이 되지만 불안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63쪽)
 
아 책을 읽으며 마음이 평온해지는 감각을 경험했다. 숲 속 한가운데에 서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지금,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하고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