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 김영하
2025-05-02조회 90
- 작성자
-
김은미
- 이메일
-
소설가 김영하의 두 번은 쓰지 못 할 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펴낸 신작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김영하 작가가 우리 지역에 특강을 하러 오신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도서관 사서로서 누릴 수 있는 직업적 특권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북토크 강연자로 직접 섭외하는 데 의견을 보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 바람을 실현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조직, 다른 방법, 누군가의 인문학적 역량을 통해 성사된 김영하 작가의 특강 소식이 한 명의 독자로서 매우 반가웠다. 강연회 소식 이후 만난 책 <단 한 번의 삶>은 그래서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단 한 번의 삶>은 출간 이후 60만 권 이상 판매되며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펴낸 신작 에세이다. 유료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연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다듬어 묶은 책이라고 한다.
<여행의 이유>는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 환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로 주제를 확장시킨 사유의 여행기다. 형태가 없는 것들을 구체화시켜가는 작가만의 수려한 문체가 수많은 독자들을 ‘김영하 산문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들었기에, 그 이후 어떤 작품을 새롭게 들고나올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다.
사실, 김영하 작가가 이렇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지금 이 시기에 쓸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었다. 그래서 조금 놀랐던 것과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일상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매우 흥분되기도 했다.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원래 '인생 사용법'이라고 짓고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어떤 특별한 인생이 아닌 작가를 포함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삶'에 대해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제목을 수정했다고 한다. '인생 사용법'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고 해도 작가의 찐 팬들은 무조건 책을 펼쳐 보았겠지만, 비독자 혹은 간헐적 독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기에는 '단 한 번의 삶'이라는 제목이 훨씬 적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그리고 소로의 단언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 '단 한 번의 삶'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적기로 했다.
일단 적어놓으면 그 안에서 눈이 밝은 이들은 무엇이든 찾아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써나갔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책을 너무 일찍 쓴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세상으로 내보내고, 나는 또 미래의 운을 기다려야 한다. - 197쪽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책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책인 것은 확실하다. 가지고 있는 패를 너무 일찍 보여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텐데, 일단 패를 던지고 다음 운을 기다리는 작가의 배포가 '역시 김영하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가지고 다니며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 읽은 이유이다.
인생,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읽는 내내 하나의 담론처럼 다가와서 작가가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은 사유를 했을지 상상이 되면서 머리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작가 특유의 세련되면서 담백한 문장들이 곁들여지면서 독자들의 사유의 폭은 훨씬 넓어지고 짙어진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하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확해서 문장 속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별안간 닥치는 돌발 이벤트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는 변치 않는 삶의 화두가 될 것이다. 삶에서 명확한 것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 뿐일 테니까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어떻게 삶을 간결하게 정리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 21쪽
이 책을 통해 김영하 작가에 대해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저 읽고 쓰는 일에만 몰두하는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요가를 수련해 왔고, 머리로 서기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연습했다고 하니 그런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요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생두를 사서 프라이팬에 로스팅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범접할 수 없는 대문호이지만 사적인 영역의 삶은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가우면서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상한 것일까?
환대의 인격화
작가는 이 책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29쪽)라고 말한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환대와 적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때로는 나의 순수한 선의가 왜곡되어 날카로운 화살로 되돌아올 때도 있고, '불호'를 애써 완곡하게 표현하려다 끊어내고 싶은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에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지혜롭고 예리한 안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관계'라는 삶의 과제 속에 내재해 있는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적절히 나를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환대의 인격화가 기본값이 되면 좋겠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탭도 작다. - 61쪽
단 한 개의 삶
젊었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 밖에 없어서 괴롭다(137쪽)고 한다. 매우 공감 가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어릴 적에 많은 꿈을 꾸고 또 포기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 꿈이 결코 구체화할 수 없는 어떤 허상인 경우도 있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잘못된 결정인 줄 알면서 그대로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상태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해야 하는 부담감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자의든 혹은 타의에 의해서든, 단 한 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수천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그중 단 한 개의 삶만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 만약 그 길로 갔더라면/가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을 통해 자주 후회에 도달한다. - 187쪽
김영하 작가가 오랜 사유 끝에 깨닫고 실천한 사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143쪽)라는 문장 앞에서 겸허해지게 된다.
우리 삶의 결말을 어떤 서사로 수정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잘 살아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작가가 축복의 말을 건네며 이 책을 마무리했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들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조각들이, 부디 절망보다 희망이 압도인 비율을 차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이 시기에 용기 내서 이 책을 독자들에게 선사한 이유이자 바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